【머리말】
저는 때때로 상상하곤 합니다. 이천 년 전, 갈릴리의 언덕 어디쯤에서 예수께서 군중 앞에 서셨을 때, 그 자리에 제가 있었다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을지 말입니다. 바람에 실려 오던 한 사람의 목소리, 기대와 의심이 뒤섞인 얼굴들, 그리고 그 순간을 지나 오늘까지 이어져 온 무수한 전승과 해석들…. 우리는 그 전해짐의 사슬을 통하여 이야기를 받아 왔습니다만, 그 내용은 때로 너무 난해하게 느껴지고, 누구의 주장과 관점에 기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론으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그러는 사이, ‘아버지의 나라’는 쉽게 다가오지 못하는 먼 약속처럼 우리 곁을 맴돕니다. 이 책은 그 거리감을 조금이라도 줄여 보고자 하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바라는 일은 새로운 교리를 덧붙이거나, 누군가의 해석을 힘으로 누르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랜 세월 켜켜이 쌓여 온 해석의 층위를 잠시 내려놓고, 처음의 숨결로 되돌아가 “실제로 어떤 말씀이 전해졌으며, 그 말씀이 어떻게 사람들의 삶을 움직였는가”를 묻고자 합니다. 잃어버린 진실을 ‘증명’하겠다고 큰소리치기보다, 우리가 그 진실을 다시 들을 수 있는 상태로 마음을 정돈하는 데에 더 큰 정성을 들이고자 합니다. 진실은 논쟁의 끝에서 번쩍 드러나기보다, 대개는 조용한 경청과 성실한 실천 속에서 서서히 형태를 드러내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본서는 가능한 한 처음의 자리로 거슬러 올라가려 합니다. 초기 증언과 기록을 대할 때에는 그 시대의 언어와 관습, 정치와 종교의 긴장, 지리와 경제의 조건을 함께 염두에 두겠습니다. 원어의 뉘앙스를 무분별하게 일반화하지 않되, 말 한마디가 품고 있는 의미의 폭을 가늠하려 노력하겠습니다. 무엇보다 그 말씀을 들었던 평범한 이들, 고단한 일상을 살아내던 장정과 부녀자, 병든 이와 배움이 적었던 사람들의 표정과 필요를 상상하며 읽고자 합니다. 거창한 체계나 화려한 논증이 아니라, 삶을 바꾸는 간명한 뜻에 귀 기울이려 합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이미 아시듯, 예수에 관한 전승은 풍부함만큼이나 상충을 품고 있습니다. 동일한 문장을 두고도 학자마다, 전통마다 다른 결을 내어놓습니다. 저는 이러한 다양함을 결함으로만 여기지 않겠습니다. 다양한 해석은 오히려 한 문장의 깊이를 밝히는 빛이 될 수 있으니, 서로 다른 관점이 비추어 주는 단면들을 정직하게 대조해 보겠습니다. 다만, 단정할 수 없는 대목에서는 머뭇거림을 회피하지 않겠습니다. 확신이 허락되지 않는 곳에서까지 확신의 어조를 빌려 쓰지 않겠습니다. “모른다”고 말해야 할때에는 분명히 그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이 진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믿습니다.
그와 동시에, 본서는 신앙과 이성의 협력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신앙 없는 이성은 건조해지기 쉽고, 이성 없는 신앙은 경솔해지기 쉽습니다. 저는 두 길이 서로를 비추며 동행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기록을 해석하는 이성의 수고는 신앙의 깊이를 돕고, 신앙의 겸허함은 이성이 놓치기 쉬운 인간과 세계의 깊이를 기억하게 합니다. 이 책이 그사이의 다리 역할을 조금이나마 하게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왜 오늘 우리에게 선뜻 다가오지 못하는가를 묻는 일은 곧 ‘우리의 삶은 그 나라를 환대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묻는 일과 맞닿아 있습니다. 저는 본서에서 그 나라를 먼 신화로 밀어내지 않겠습니다. 대신 우리의 관계, 말, 선택, 소비, 용서와 화해, 연대의 미세한 자리들 속에서 그 나라의 징후를 찾고자 합니다. 거기서 발견되는 작은 빛들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더듬어 가겠습니다. 만일 잃어버린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화려한 이론의 정상 보다도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더 또렷이 빛날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께 몇 가지 약속을 드립니다.
첫째, 가능한 한 평이한 우리말로 쓰겠습니다. 이해를 방해하는 불필요한 전문 용어와 과장된 수사를 경계하겠습니다.
둘째, 근거와 해석을 분명히 구별하겠습니다. 인용은 출처를 밝히고, 제 의견과 전통의 주장, 그리고 가능한 사실 사이에 경계를 그어 드리겠습니다.
셋째, 판단이 어려운 대목에서는 보류와 유보를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섣부른 단정은 독자 여러분께도, 주제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넷째, 독서가 지식의 축적에 머물지 않고 삶의 변화를 향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작은 실천의 제안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부디 이 책을 읽으시는 동안, 독자 여러분께서도 한 번쯤은 그 옛 자리에 서 보아 주십시오. 먼지 날리는 길가, 물결 치는 호숫가, 사람들이 모여 들던 작은 마을의 광장…. 그 한가운데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는지, 그 목소리가 오늘 우리의 언어로 들린다면 무엇을 요청하겠는지 함께 물어 주시길 청합니다. 저는 제 해석을 내세우기보다, 여러분의 양심과 지성이 스스로 응답하도록 공간을 비워 두고자 합니다. 때로는 제 말보다 여러분의 침묵이 더 충실한 해석이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하며, 성급한 결론 대신 오래 머무르는 경청을 선택하겠습니다.
이 책이 모든 의문을 풀어 드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약속을 드릴 수 없음도 잘 압니다. 다만, 우리가 진실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돕는 작은 등불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만약 그 길 끝에서 우리가 알게 모르게 중얼거리게 된다면, 저는 그 한마디면 족하겠습니다. “그 나라는 이미 우리 곁에 가까이 와 있었습니다.” 독자 여러분과 함께 그 빛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