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를 잘 산다는 말은 거창한 목표를 새로 세우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미 쌓인 것들 가운데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내려놓을지 조용히 고르는 기술에 가깝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라는 태도는 무력함이 아니라 시기와 경계를 아는 분별이다. 몸이 부르면 쉬고, 사람이 부르면 응대하되, 마음이 “지금은 아니다”라고 말하면 한 발 물러서는 용기. 나에게 남은 에너지를 어디에 쓸지, 남의 기대보다 나의 리듬을 기준으로 정하는 태도다.

욕심을 비운다는 것도 포기가 아니다. 먹을 만큼만 먹고, 만날 만큼만 만나고, 가질 만큼만 가진다는 뜻이다. 노후의 욕심은 종종 그럴듯한 이름을 달고 온다. 건강에 대한 과도한 집착, 과거의 역할을 붙잡고 싶은 마음, 타인의 속도와 비교하는 습관이 그렇다. 하지만 오래 살수록 삶은 균형의 문제임을 알게 된다. 충분함을 ‘더 많이’에서 찾지 않고 ‘딱 맞음’에서 찾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이 비움의 다른 이름이다.

“그냥 산다”는 말도 오해받기 쉽다. 아무렇게나가 아니라, 꾸밈없이라는 뜻이다. 특별한 사건이 없어도 하루가 괜찮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 아침 햇살이 방바닥에 번지는 걸 잠깐 바라보고, 골목길의 감나무가 한 주 사이 얼마나 붉어졌는지 눈여겨보고, 오래된 그릇에 국 한 그릇을 담아 천천히 비우는 일. 이런 사소한 순간들이 쌓여 삶의 질감이 된다. “그냥”은 무심함이 아니라, 충분히 주의 깊은 마음이 만들어 내는 담백함이다.

노후에는 관계도 다시 정리된다. 오래된 인연이 한두 개 사라지기도 하고, 이웃의 안부가 뜻밖의 위로가 되기도 한다. “오라면 오고”란, 필요할 때 기꺼이 다가가는 마음이고, “가라면 가고”란, 떠나야 할 때 붙잡지 않는 품위다. 내가 먼저 전화를 걸고, 때론 먼저 전화를 끊을 줄 아는 거리감. 그 사이에서 얻게 되는 건 외로움이 아니라 가벼움, 그리고 서로를 존중하는 새로운 질서다.

몸은 신호를 숨기지 않는다. 무릎이 알려주고, 어깨가 말해 준다. 해야 할 일보다 할 수 있는 일을 우선하는 것이 지혜가 되는 시기다. 하루의 목표를 ‘완벽’이 아닌 ‘무리하지 않음’으로 바꾸면, 성취는 줄어들지 않는다. 대신 만족이 늘어난다. 남은 시간의 단위를 결과가 아니라 온도로 세기 시작하는 것이다. 덜 바쁘고, 더 따뜻하게.

노후가 꼭 고요하기만 해야 하는 건 아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초보의 기쁨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다만 속도를 내 세상을 이기려 하지 않을 뿐, 호기심을 놓지는 않는다. 작은 악기 하나를 익히고, 손글씨를 다시 연습하고, 가까운 동네를 더 천천히 걸어 본다. 남은 생을 넓히는 방식은 멀리 있지 않다. 익숙한 것에 새 눈길을 덧대는 데에서 충분히 시작된다.

결국 노후를 잘 산다는 건 이렇게 정리된다. 올 것은 맞이하고, 갈 것은 보내며, 마음에 과부하를 주는 욕심을 덜어 내고, 오늘의 온도에 맞춰 하루를 배치하는 일. 이 단순한 문장이 삶의 기술이 된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욕심을 내지 말고 그냥 산다.” 그 말대로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충분히 잘 늙고 있는 것이다.